'동의보감'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9.12 한의학이라는 망상에 빠진 KBS #1
  2. 2009.08.06 진정한 의학은 하나

그러나 전문분야 아님 + 바쁨 + 귀찮음의 압박으로 시간은 계속 가고, 약간의 진전은 있었지만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더 자료를 찾아봐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더 이상 묵히면 이건 떡밥으로써의 가치를 상실할 것 같다(이미 방송 후 한 달 지났다 orz)는 생각이 들어 일단 되는 대로 써 보기로 했다. 정 모자란 건 쓰면서라도 찾아보는거지 뭐. 이렇게라도 해야 글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텍스트큐브로 이사오기 전 블로그에서도 3월인가부터 쓰기 시작해놓고 아직까지 미완성 비공개로 남아있는 글도 있지만 orz) . 뭐 아무도 쓰라고 재촉하지는 않지만 orz...

 


-여기부턴 본문


 KBS의 동의보감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기념 특집 프로가 두 편으로 나눠서 방송되었으므로, 이 글도 두 편으로 나눠서 써 보려고 한다(이 글은 1편에만 해당하는 내용이다). 물론 두 번째 글은 언제나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당 프로그램을 직접 보고 싶은 사람은 여기로. 방송 직후에는 고화질 다시보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_-;


프로그램은 동의보감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을 소개하면서, 그걸 추진한 문화재청 이건무 청장의 인터뷰를 내보낸다. 그리고, 이거 만드느라 미국에도 다녀들 오셨나보다. 무려 존스홉킨스 의대 교수의 인터뷰도 들어있다.

 근데 말이다, 이건무 청장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결국 동의보감의 중요성은 '당시'의 의학을 집대성한 백과사전이라는 것, 그러니까 그 문화사적 가치에 있다는 거다. 이건 저 존스홉킨스 의대 교수의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단 저 교수의 소속부터 보자. 의사학과... 그러니까 의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란 거다. 무려 저 멀리 떨어진 미국인 교수가 동의보감을 알고 있고, 그걸 칭찬하고 있으니 일견 대단해 보이지만,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도 결국 자신의 분야인 의사학과 관련된 부분, 그 편집의 명확성과 독창성에 대한 거다. 이 프로그램 제목인 '동의보감, 세계적 의학서적이다'(현재형이다)라던가,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후 나온 한의학계의 논평 '한의학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이라는 등의 내용 따위와는 관계가 없단 얘기다. 저 두 인터뷰 사이에, 보건복지가족부 사람이 나와서 이번 등재 추진사업은 언제부터 어떻게 추진했고 하는 얘기를 하는데, 보건복지가족부에서는 유네스코가 뭐 하는 덴지 몰랐다는 걸까? 그네들은 설마 동의보감을 진지하게 의서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아... 뭐 깔 거야 많지만 겨우 프로그램 도입부를 가지고 까는 것도 참 재미없는 일인 것 같고. 20분쯤인가부터는 동의보감의 목차대로 '내경','외형','잡병','탕액','침구'의 순서대로 동의보감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 순서대로 따라가는 게 무난하겠지.


  • 내경편

몸 속을 비추는 거울이라서 내경이라는데, 그거랑 내경편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태극권은 뭔 관계인지 도통 모르겠다. 인간신체는 우주와 같아 모든 자연법칙이 그대로 적용되고, 이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탈이 난단다. 그래서 병 발생 이전에 신체를 조화시키는 게 양생이란다. 아, 물론 예방의 중요성은 현대의학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긴 하다. 근데, 우주랑 자연법칙이 어떻고 조화가 어떻고 하는거랑 그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아무리 답이 맞아도 그 답에 이르는 과정이 엉망이면 그건 틀린 거고, 아무리 멋들어진 설명이라도 그걸 써먹을 데가 없으면 그건 그냥 잡소리일 뿐이다. 삼라만상 우주만물과 자연의 이치로부터 양생이 좋다는 걸 이끌어내는 설명을 보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말고 또 뭐가 있을까?


그런 내용들이 좀 나오더니, 동의보감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처방이라는 경옥고 얘기로 빠진다. 그걸 제조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좋다. 무슨무슨 약재들을 뭘로 빻는데 쇠붙이를 쓰면 안되고 그걸 무슨 나무로 불을 때서 얼마동안 달이다가 식혔다가 또 중탕을 햇다가 어디에 얼마 동안 뒀다가... 아무튼 그래서 정성이 무지 많이 들어가는 약이란다. 좋다. 다 좋은데,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정성이 많이 들어간 약이니까 좋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하기사, 여기 링크하는 이야기의 주인공도 분명 '그걸' 만들어내기 위해 정성은 엄청 많이 들였을 거다. 그 정성을 엉뚱한 데 들여서 문제지. 그러니까, 문제는 '정성'의 양이 아니라는 거다. 물론 정성을 안 들이는 것보다야 좋을지도 모르지. 근데, 그 정성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과 근거는 최소한 갖고 있어야 되는 거잖아.


"경옥고는 정성으로 제조된 약이다. 깨끗한 물처럼 약을 빚는 사람의 깨끗한 마음이 필수적이다."


...그런 기준도 근거도 없으니까 방송에서 이런 얘기를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거겠지. 근거도 기준도 없는 막연한 정성과 깨끗한 마음이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는데. 바로 이것처럼... 약재를 빻을 떄는 금속 말고 나무만 쓰고, 불은 꼭 뽕나무로만 때야 된다는 그런 정성과 노력, 아무 기준도 근거도 없다면 이런 것과 다를 게 없잖아.


  • 외형편

루 게릭병 환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애석하게도 현대 의학은 아직 루 게릭병에 대해 뚜렷한 치료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네이버 의학상세정보 참고) 그러나 우리의 훌륭한 한의사 선생님들은 그걸 치료해 내셨나 보다. 대략 26분경부터 나오는 루 게릭병 환자의 상태를 볼 때 완전한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워낙 난치병이니 삶의 질이 개선된 것만으로도 훌륭한 치료가 되겠지. 그래서, 어떻게 치료하는 건가 궁금해서 PubMed에서 검색해봤다. 그런데...


루게릭병의 정식 영문명칭인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와 침술을 뜻하는 acupuncture를 넣어서 검색해봤다. 물론 저거 말고도 다양한 검색어로 검색해봤다...


루게릭병의 치료와 관련해서, 제대로 된 논문 한 편조차 없다. 뭐 몇 종류의 논문이 검색에 걸리긴 했지만 별로 영양가 있는 내용은 없었고, 루게릭병 환자들 중 어느 정도나 대체요법을 시도하는가, 시도한다면 어떤 대체요법을 시도하는가 하는 설문조사 등이 검색되는 정도. 확립된 치료법이나 그 기전, 아니면 어느 정도 규모의 집단을 대상으로 잘 설계된 임상시험은 고사하고(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그 흔한 case report 하나조차도 없다.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드래그)

그렇게 좋은 거면 같이 좀 알자. 


그런데,

위에 링크한 네이버 의학상세정보의 루게릭병 부분에 보면 위와 같은 내용이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루게릭병 환자 중에 10% 정도는 저절로 상태가 좋아지기도 한다는 거다. 아, 물론 방송에 나온 그 분이 저 10%에 해당한다는 보장은 없다. 침으로 고쳤다니 믿는 수밖에.


* 여기까지 방송 보느라 수고하셨으니 잠깐 쉬어 가라는 의미였을까. KBS에서 아주 혼자 보기 아까운 명품 동영상을 준비해 주셨다. 쉬어가는 의미에서 잠시 구경을. (저거 하면서 저 아나운서는 얼마나 웃겼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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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병편
  • 탕액편

그 이후에 이어지는 잡병편, 탕액편으로 들어가면 이건 완전 중구난방이다. 난 도대체 제작진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동의보감 내용 소개를 해 주는 건 좋은데, 프로그램 제목대로 동의보감이 '세계적 의학서적이다' 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라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되는 거 아닌가? 잡병편에는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미이라가 발견됐는데 간디스토마 환자였다. 근데 직접사인은 간디스토마가 아니라 기도확장에 의한 출혈이었다. 근데 몸 속에서 꽃가루가 많이 발견됐다. 간디스토마 때문에 피를 토하니까 피를 멎게 하려고 동의보감에 나온 대로 꽃가루를 먹은 것 같다.

이런 얘기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걸까? 간디스토마에 의한 사망을 막아준 동의보감의 꽃가루 처방 킹왕짱? 꽃가루 먹다가 잘못 흡입해서 폐에 문제가 생겨 사망했을 가능성은 없나? 뭐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몇백년 전에 쓰여진 책의 내용이 다 맞길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가지고 잘못됐다고 까는 것도 웃기니까. 근데, 이쯤 되면 이 프로그램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가 없다는 거다. 동의보감이 우수한 의서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동의보감 내용 소개를 해 주겠다는 건지...

탕액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동의보감의 처방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자체는 동의보감의 우수성을 논할 근거가 못 된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구성된 그 처방이 표준처방(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과 비교했을 때, 아니 최소한 플라시보와 비교했을 때 더 나은 효과를 보이는지가 입증되지 않으면 그건 동의보감의 장점이 아니라 동의보감이 '그냥 그랬다더라'라는 이야기밖에 안 되는 거다. 아... 뭐, 제대로 된 치료법이 아무것도 없던 시기에 플라시보 효과라도 보려면 어쨌든 '무언가를' 해야 했으니,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의료행위가 가능했다는 건 그 시대에는 장점이었을 거다. 어떤 병에 걸렸는데 처방이 '용의 비늘을 달여먹는다'라면 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느낌에 낙담해서 병이 더 안 좋아 질 수도 있지만, 만약 처방이 '소주에 고춧가루를 풀어먹는다'라면 그게 효과가 있건 없건 일단 실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플라시보 효과라도 기대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감기 걸렸을 때 소주에 고춧가루 풀어먹는 건 효과가 없다. 아니 마이너스 효과가 있을지도...)

물론 수백 년 전에 쓰여진 책에다 대고 플라시보와 비교해서 효과를 입증한 내용이 없다고 따지는 게 웃긴 일이란 건 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다시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들이 동의보감이 '과거에 우수했음'을 말해 주는 근거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현재 우수함'을 말할 수 있는 근거로는 말이 안 된다는 거다. 그런데 왜 프로그램 제목은 '동의보감, 세계적 의학서적이다'이며, 왜 동의보감의 내용을 과학적 방법을 이용해서 검증하려는 시도는 별로 없으며,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사들은 아직도 동의보감의 내용을 금과옥조로 삼아 따르고 있느냔 말이다.

  • 침구편

1부 마지막 부분인 침구편에서 정말 간만에 제대로 깔 거리가 나온다. 뜸으로 폐경기 여성의 안면홍조를 치료한다고 자랑하면서, 친절하게 Menopause지(IF가 3.5정도였던가? 아무튼 나름 준수한 잡지다)에 실은 논문까지 소개해 준다. 아주 반가웠다. 이러면 자료 찾는 수고를 더니까... 그 논문, 바로 이거다. 에디터의 코멘트가 달려 있길래, 그것도 같이 읽어봤다. 근데... 좀 웃기다. 내가 색안경을 끼고 봐서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좀 웃겼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아무튼, 다시 방송 내용으로 돌아오자. 1부는 다음과 같은 멘트로 마무리된다.

동의보감을 제대로 연구한다면, 우리는 동양의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연구를 안 했다는 얘기잖아.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도 않은 걸 갖고 대뜸 사람한테 실험하는 것부터 좀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 수천년 간 경험적으로 검증된 거라고? 그 경험이란 것도 체계적으로 추적, 분석되고 기록을 통해 축적된 것이 아니라 그냥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뿐일 텐데,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아직도 그런 걸 믿고 몸을 맡겨야 될까? 그나저나, 왜 여기서까지 라면사설을 봐야 되는 거냐. 일단 동의보감을 제대로 연구한 다음에 얘기하자. 제발 좀...
 
제목을 바꾸자. '동의보감, 세계적 의학서적이다'가 아니라. '세계적 의학서적이'로. 그 정도까진 인정해줄 의향이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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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타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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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의보감 사태를 보며.

 

동의보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런 일이 있었다. 그래, 그냥 그랬다는 거다. 좋아할 사람은 좋아하면 되고, 아무 느낌 없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있으면 된다. 근데, 좀 엉뚱한 데서 문제가 터졌다.

 

대한한의사협회의 경축 담화문

동의보감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대한 의료일원화특위 논평

의사협회 동의보감 폄하 논평 '빈축'

 

대한한의사협회와 대한의사협회에서 나온 보도자료를 놓고, 언론사들이 신났다. 웹서핑을 넓게 하지는 않는지라 장담은 못 하지만, 네티즌들도 덩달아 신난 것 같다. 싸움구경은 재밌는 것이고, 의사들과 한의사들의 싸움은 분명 대한민국에서 가장 재밌는 싸움 중 하나이리라. 개인적인 생각은 뒤에 가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 한의협과 의협의 얘기를 각각 나름대로 세 줄 요약해 보자면.

 

* 한의협의 이야기

- 동의보감은 명실상부 한의학을 대표하는 의학서임

- 고로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한의학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한 것임

- 열심히 하겠습니다 ^-^

 

 

* 의협의 이야기(1)

-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축하할 일임

- 근데 솔직히 의학적으로 봤을 땐 좀 말이 안되는 듯...

- 의학서로써의 가치보다는 문화유산으로써의 가치가 인정된 것임

 

 

일단 접어두고, 아무튼 유네스코가 뽑은 거니까 유네스코의 얘기를 들으면 되잖아.

 

그리고, 이건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한 모 기관에서 신청서로 제출한 자료 같은데, 영어로 되어 있는 데다가 무려(?) 15쪽이나 되는 관계로-_-; 신청 사유를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길어서 접어놨음)

여기서 '한의학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나?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제출한 신청 내용에 한의학이 우수하므로 그 고전인 동의보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나? 아니면 유네스코의 (일반적인) 선정기준에 '해당 기록이 그 주제 분야에서 현재에도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음'이라는 항목이 있나?


 

없다. 그런 이유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나라의 신청사유란 것도 결국 국가주도의 공공보건사업이었다는 점, 당시 동양의 문화와 의학을 연구할 수 있는 사료로써의 역사적 중요성, 그리고 초판본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네스코도 그 기록물의 내용이 과학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를 가지고 기록문화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면 매년 얼마간 돈도 나온단다. 그건, 동의보감을 가지고 의학서를 쓰고 의학교육을 하고 의학연구를 하는 데 쓰라는 얘기가 아니라, 책 안 상하게 잘 보존해서 당시의 동양의학, 당시의 동양문화와 그 교류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하란 얘기다. 근데 왜 한의학의 우수성을 운운하나? 한의학은 의학이 아니라 역사학인가?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선정을 가지고 '한의학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 운운하는 것은 혹시 현재의 한의학이 아직도 동의보감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인가? (이렇게 되면 둘 중 하나다. 동의보감이 17세기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ㅡ그나마도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그때까지 전해지던 것을 집대성한 것인데ㅡ 내용이 너무 킹왕짱이라서 지금까지 수정보완할 내용이 없었거나, 아니면 한의학계가 동의보감을 수정보완할 의지도 능력도 없거나)

 

그런 면에서 의협(정확히는 의료일원화특위)의 논평은 지극히 적절하다. 위에도 썼다시피 유네스코가 인정한 동의보감의 가치는 의학서로써의 가치가 아니라, 문화유산으로써, 사료로써의 가치다. 그렇기에 '세계가 인정한 한의학의 우수성'운운하는 한의협의 논평은 자뻑이거나 사기다. 그런 면에서,

 

의사협회 동의보감 폄하 논평 '빈축'(연합뉴스)

의협 “동의보감은 첨단의학서 아니야” 논란 (헤럴드경제)
의사협회 "동의보감에 '황당'내용 가득" 폄하 파문(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동의보감 폄하’ 황당한 의사협회 (문화일보)

“세계유산이지만 비상식적 내용 가득” 醫協, 황당한 ‘동의보감’ 폄하 (세계일보)

의사협 ‘세계유산 동의보감’ 폄훼 (경향신문)

의사협 ‘동의보감 폄하’ 논란(한겨레신문)

의사협회, 동의보감 비하 논란(중앙일보)

동의보감 깎아내린 의사협회(서울신문)

 

이런 식의 제목뽑기들은 좀 많이 실망스럽다. '의사들 저거 뭐냐'하는 느낌이 풀풀 나는 제목을 뽑는 저 신문들은 정말로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한의학계의 경사,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경사'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로 '한의학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물론 나도 동의보감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한다. 다만, 아닌 건 아니라는 거다. 유네스코는 의료단체가 아니고, 과학, 교육, 문화활동을 돕기 위한 단체다. 동의보감이 의학적인 면에서 훌륭한 자료인가 아닌가는 애초에 유네스코의 관심사가 아니다. 설사 유네스코가 동의보감을 훌륭한 의서라고 판단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고 쳐도, 의학분야에 대한 전문성이라고는 없는 유네스코의 평가 따위 한의학계가 기뻐할 일이 아니다. 비전문가의 찬사 따위에 기뻐한다는 것 자체가 한의학의 허접함, 자신없음을 드러내는 증거는 아닌가?

 

의외로(?) 조선일보는 오히려 의협 쪽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뉘앙스의 제목뽑기를 했고, 애초에 의학계열의 미디어인 코메디닷컴과 청년의사의 제목이 오히려 조선일보보다 중립적이다.

 

"오늘날 상식에는 안맞는 내용으로 가득"(조선일보)

동의보감 등재, 의협-한의계 신경전(코메디닷컴)

‘동의보감’ 유네스코 등재 놓고 醫-韓 공방(청년의사)

 

이번 의협의 반응을 대부분이 그저 의학계-한의학계의 밥그릇 싸움으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막연히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사람들이 의사집단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가 도대체, 도대체 어떻기에 언론과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게 차가울까 하는 우울한 느낌. 정말이지 답답하다.

 

 

# 의학은 하나다

 

의료의, 의술의, 의학의 목적은 뭘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것이 각 문화권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건, 그 목적은 결국 건강이다. 좀 자세히 말하자면 질병 상태로부터의 회복과 건강 상태의 유지 정도 되겠다. (단정적으로 썼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쓴 것뿐이다. 그러나 모두 동의할 거라고 믿는다-_-;;; )

 

그렇기에, 의학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떤 방법론을 가지고 있든, 어떤 문화와 철학에 기반하고 있든 위에 적은 의학의 목적에 동의한다면 의학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질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의학이다. 서양의학이니 한의학이니 중의학이니 대체의학이니 뭐니 해서 서로 다른 형태의 의학, 서로 다른 방법론과 철학을 가진 의학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진정한 의학은 더 나은 치료를 위해서라면, 더 좋은 건강유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방법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은 다르다고? 웃기지 마라. 환자를 보는 관점이 다르니 철학이 다르니 하는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어떤 상황에서건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의학은 그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한 끝없는 노력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란 걸 어떻게 찾느냐다. 옛날에야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해 보고 그 중에 어떤 게 괜찮다더라 하면 그 방법을 썼지만 지금 세상에 그럴 수는 없다. 닥치고 생체실험은 윤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하려면 충분한 세포실험과 동물실험을 통해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된다. 인체는 정상일 때는 이렇다. 병에 걸렸을 때는 저렇다. 이 수술법은 이러이러하며, 이 약은 어디어디 작용해서 어떤 효과를 낸다... 하는 등의 근거를 바탕으로 의료행위를 해야 된다는 거다. 수천 년 전부터 쓰여 왔던 방법이라고 해도 지금 그걸 사용하려면 그 근거가 있어야 된다. 옛날부터 쭉 쓰던 방법이라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즉, 의학은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에 기반해야 된다는 거다. 적어도 '서양의학'은 그렇게 하고 있다(물론 현대과학의 발전 이후부터긴 하지만). 실험과 연구를 통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 있고, 기존에 잘 사용되던 방법이라고 해도 역시 연구를 통해서 그 근거를 다지고 있다.

 

근데, 한의학에선 그렇게 하고 있나? 사상의학의 이론적 근거는 확립되었나? 경락과 기혈은 있긴 있는 건가? 찬 음식과 더운 음식은 뭔가? 수많은 한약의 작용기전은 파악되었나? 이런 기사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자진 논문철회 논란…근거 없는 철회 VS 학자의 양심 고백

[과학 칼럼] ‘클라크의 법칙’

 

 

 

# 다시, 의학은 하나다.

 

의사협회, 한방의료기관 X-레이 등 불법사용 강력 대응

솔직히, 이런 기사들 보면 좀 아쉽다.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더 좋다는 것이 확인된 방법이라면 형식에,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그 어떤 방법이라도 가져다 사용하는 게 진정한 의학이라고 생각하니까. (물론 저런 것들을 사용하려면 그만큼 철저한 교육을 받아야 될 것이고, 혹시나 저런 걸 교육하는 것마저도 의료계에서 막고 있다면 그건 좀 짜증나는 일이다)

 

의사 면허와 한의사 면허를 통합하자. 의사들에게 침과 탕약을 허락하고, 한의사들에게 메스와 항생제를 허락하자. 의과대학과 한의과대학의 교육과정을 통합하자. 의대생들에게 황제내경과 동의보감을, 한의대생들에게 로빈스와 해리슨을 읽히자.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지를 그들의 판단에 맡기자. 어떤 방법이 과학적 방법을 통해 검증된 방법이고 어떤 방법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 그들이 판단할 것이다.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그 결과는 국민건강 수준의 변화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방법이 더 좋은지,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가 곧 명백해질 것이다. 사실상 대한민국을 거대한 의료시험장으로 만들고 엄청난 혼란과 의료비 지출의 증가를 가져오겠지만 뭐 어때. 의사와 한의사 모두 의료법에서 정하는 의료인이고, 의료인이 배운 범위에서 의료행위를 소신껏 선택하게 하는 것에 법적 하자는 전혀 없을 테니까.

 

...물론 난 한방진료를 하는 병원엔 안 갈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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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작 의협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은 의료일원화특위의 논평이라고 되어 있다. 의협의 공식입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의협의 본심도 크게 차이가 없으리라고 본다.

 

p.s.1

돌아다니면서 기사 읽던 중 이런 걸 발견했다.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고... 꼭 봐야겠다 하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 시간에 실험실을 지켜야 된다. OTL...

 

p.s.2

졸린 눈을 비비며 제목을 뭘로 할까 고민하던 차에, 며칠 전에 겨우 끝냈던 어떤 책 10장의 제목이 떠올랐다. 다만 이 글의 내용을 그 책과 연결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다...-_-;;;

 

p.s.3

동의보감 얘기가 나온 김에 읽어볼만한 것. 한글 번역 동의보감!

http://hidream.or.kr/dongeuibogam/donguibogam_main.html

...사실 나도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음. 정말 투명인간이 되는 법이 나와 있을까?

Posted by 타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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