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도킨스가 또 한번 창조론(+지적설계론)을 제대로 까 줄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평소의 언어습관대로 '쇼'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해석해서 '지상 최대의 쇼 = 희대의 뻘소리 = 창조론' 이라는 뜻일 거라고 생각했던 건데, 열어 보니 정반대였다. 하기사, '쇼'라는 단어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든 아니면 그 반대든 간에, 창조론 같은 것에 '지상 최대'라는 타이틀이 붙는 것도 좀 아까운 일이긴 하다. '지상 최대의 헛소리'라던가, '지상 최대의 사기극' 이라는 타이틀도 창조론에겐 과분하거든. 세상에 창조론보다 더 그럴싸하고 창조론보다 더 논리적인 것 같은 헛소리들도 얼마나 많은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처음 들었던 생각은 '도킨스가 많이 부드러워졌구나' 였다. 그의 이전의 책들과 비교했을 때, 뭐랄까, 날카로움이라던가 독기라던가 하는 느낌이 많이 빠지고 그 대신에 최대한 자상하게 설명하려는 자세와, 자신이 연구해 온 자연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나이가 들고 은퇴하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겨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이 책이 상정하고 있는 독자층이 그의 표현대로 '역사 부인주의자들'보다는 그들을 제대로 상대하고 싶은 사람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진화에 대한 '정보 전달'이 주된 목적인 책이니 감상이라고 적을 만한 건 별로 없고, 한 가지 꼭 언급하고 싶은 건 '그저 하나의 이론' 이라는 주장이다. 도킨스가 이 책에서 한 장을 할애해서, 그것도 1장의 제목을 '그저 하나의 이론?' 으로 해서 직접 언급할 만큼 닳고 닳은 주장인 모양이다. 사실 이런 식의 주장은 그냥 국어사전 드립만으로도 정리가 되는 것인데, 그래서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옥스퍼드 영어사전' 의 내용을 다시 인용해 보면,
이론, 정의1 모종의 설명으로 제공된 어떤 사상들이나 진술들의 체계, 또는 일군의 사실들과 현상들에 대한 해설.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확인 또는 입증되었으며, 알려진 사실들을 잘 설명한다고 제안 또는 인정된 가설. 일반법칙, 원리, 알려지거나 관찰된 사실에 대한 원인으로 주장된 진술.
이론, 정의2 모종의 설명으로 제안된 가설. 즉 가정, 추론, 추정, 무언가에 대한 하나의 사상 혹은 사상들의 집함. 개인적인 의견이나 견해.
- 지상 최대의 쇼. p22-23
이게 구분이 안 되면 가설이 어쩌구 이론이 어쩌구 법칙이 어쩌구 하는 황당한 말장난을 하게 되는 거지. 이 책의 어디에선가 진화론을 공격하려는 사람들은 우선 자신이 공격하려는 대상에 대해서 좀 제대로 공부하는 게 먼저 아닐까 하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보다도 급한 건 각자의 국어를 먼저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아닐까.
진화와 관련된 자료들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생명의 나무다. 오른쪽 그림 같은... 사실 그렇다고 저걸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긴 하지만. 오른쪽 그림은 동물, 식물, 원생생물(protists), 박테리아, 고세균(archaea), 균류(fungi)를 포함한 3000종의 생물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다. 문득 찾아본
어느 책에 따르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종은 총 1250만 종 정도로 예상된다고 한다. 그걸 저런 식으로 그려낸다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그리고 그 생명의 나무의 나뭇가지를 따라가서 그 모든 가지가 결국 한 점으로 모인다는 것을 보게 될 거라는 건 얼마나 신비한 일인지.
...그리고, 그런 마음이 너무 깊은 나머지, 생명의 나무를 자기 몸에 새긴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난 저렇게까지 할 자신은 없어서...orz
이 책은 창조론에 대한 매우 적절한 반박이고, 진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는 데 매우 좋은 책이며, 관련분야의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도킨스는 참 글을 잘 쓴다. 분량이 압박스럽고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쉽게쉽게 읽히고 또 읽고 나면 그만한 값어치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전공, 지금의 위치를 선택하기까지 나름 여러가지 사연도 있고 고민도 있었는데,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과학의 한 가지, 생물학의 한 가지를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자랑스럽고 다행스럽다. 아무튼, 자연과 생명은 아름답고, 그 신비를 공부하면 할수록,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할수록 그게 점점 더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을 느낀다. 굳이 종교적인 상상력이 없어도, 신의 섭리를 찾지 않아도 난 그들이 느끼는 것보다 더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구태여 부작용을 동반하는 종교적 환각에 의존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 책 후반부의 멋진 한 마디를 인용하는 것으로 여기서 마무리.
우리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멋진 무한한 형태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무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직접적인 결과다. 그것은 마을 유일의 게임, 지상 최대의 쇼다.
- 지상 최대의 쇼. p565